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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Korean Music)/국악기 길라잡이

동이가 연주한 해금, 무궁한 가능성의 껍질을 벗기다



또렷하게 아로새겨진 해금에 대한 추억


23년 전의 일입니다. 

시내 한 복판의 으리으리한(당시만 하더라도) 호암아트홀에서 박범훈(현 중앙대 총장)이 이끄는 중앙국악관현악단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었죠. 창단 공연이었던터라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펼쳐진 그 날 공연의 다채로운 연주곡목들은 일일이 떠올릴 수 없지만, 유독 아직도 그 때 받은 전율마저도 잊을 수 없는 연주가 있습니다. 




[ 중앙국악관현악단 공연 모습 ]



해금과 거문고, 거문고병창의 명인이자 작곡가로도 유명한 김영재(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방아타령을 주제로 한 해금협주곡”과 지휘자가 직접 지휘하면서 협연(독주악기가 관현악과 어울려 연주하는 형태)한 “창부타령을 주제로 한 피리협주곡”이 그것인데요. 그 중 유달리 기억 저편에 또렷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해금 연주랍니다. 



"방아타령을 주제로 한 해금협주곡" 들어보기 1





"방아타령을 주제로 한 해금협주곡" 들어보기 2

해금은 요즈음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동이"에서 주인공인 동이가 연주해 숙종(지진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한 바로 그 악기이죠. 이제는 심심치 않게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연주모습이나 음악이 활용되고 있어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20여년 전 당시만 하더라도 홀대받는 국악 속의 한 악기일 뿐이었구요. 




[ 동이 해금 연주모습 - 이미지 출처 ]



연주 순서가 되자 하얀 연주복을 입고, 마치 통달린 막대기 하나 들은 듯이 그(김영재)가 무대 뒤에서 나올 때만 해도 그 막대기가 내 눈에서 감동의 눈물을 자아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답니다. 이 '신선의 신들린 연주'가 빠져들게 한 예술적 몰아(沒我)의 경지에 대한 경험은 '해금'이라는 악기의 진면목을 알게 하는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소박한 생김새, 화려한 울림


고려시대부터 연주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해금은 단 두 줄을 지닌 현악기입니다. 

가야금처럼 많은 줄로 가락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요, 거문고처럼 묵직한 대현(大絃)의 울림을 빚어내지도 않지만 해금은 ‘중현(中絃)’과 ‘유현(遊絃)’이라는 단 두 줄을 활대로 그어내는 화려한 음빛깔로 하여금 듣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악기이죠.






해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한쪽은 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열어두고, 다른 쪽은 오동나무로 만든 판을 붙여 막은 '울림통'과 ‘입죽’이라는 이름의 기둥, 그리고 줄감개인 ‘주아’가 될 것입니다. 울림통의 아랫부분에 있는 ‘감잡이’라고 하는 쇠와 주아에 연결되어 ‘원산’(줄을 받칠 수 있도록 2개의 홈을 판 나무조각)에 얹혀진 두 줄 사이에 말총으로 만든 활대를 끼워 연주합니다.






입죽을 손바닥으로 대고 손가락으로 두 줄을 감싸듯이 쥐고 연주하는 해금은, 같은 찰현악기인 아쟁처럼 줄 수가 여럿이어서 음을 구분하여 낼 수 있는 것도 아닌터라 연주자의 음감(음의 높낮이를 감지하는 능력)이 연주에 중요한 기본 조건이 됩니다. 즉 줄의 어느 부분을 쥐느냐 또는 얼마만큼의 힘으로 쥐느냐에 따라 해금이 내는 음은 천양지차가 되는 것이죠.



딸의 이야기를 떠올리게하는 소리


활로 켜서 소리내는 찰현악기의 특성을 살려 해금은, 해학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도 으뜸인 악기입니다. MBC에서 제작한 한국민요대전 충청남도편에는 해금의 이런 모습이 도드라지는 "앵금이타령"이라는 연주곡이 있습니다.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백석리에서 채록한 이 연주곡은 연주하시는 할아버님과 해금이 마치 다정한 아버지와 딸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실감납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닮은 악기가 대금이니 아쟁이니 하는 얘기를 하곤 하지만, 이 연주곡을 들은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죠. 



"앵금이타령" 들어보기 




해금의 이같은 악기구조에 따른 소리내기의 남다름은 <수제천>이나 <영산회상> 등의 음악에서 표출해내는 장중함이나 단아함 뿐 아니라, <시나위>와 <산조>, 창작음악에서는 음악적 표현의 자유로움이나 음정 변화의 용이함을 빚어냅니다. 우리 전통악기가 아닌 외국악기들과의 조화를 꾀하거나 이질적일 것만 같은 다른 음악과의 다양한 시도에 유독 여느 악기에 비해 즐겨 쓰이는 악기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탓이죠.


1996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장선우 감독이 제작한 <꽃잎>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었죠. 이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현대사의 민감한 문제를 다뤘다는 소재적 측면이나 이정현, 문성근, 설경구와 같은 인지도 높은 배우들의 열연으로도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문국악작곡가가 영화음악을 맡아 관람객들의 귀를 신선함으로 자극했다는 점이 돋보였다(이런 점이 감안되었는지는 몰라도 작곡가 원일은 이 영화음악으로 제34회 대종상 영화제의 음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죠)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화의 소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메인테마(해금 연주)는, 이후 강은일이라든가 김애라, 꽃별 등 전통의 해금 기법을 습득한 젊은 해금연주자들에 의한 새로운 음악적 시도들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국악기 해금의 무한한 가능성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노력들을 다양한 연주회 또는 음반으로 확인해보며, 새로이 펼쳐지는 국악의 미래를 기대해보는 것도 우리 일상을 지루하지 않고 풍성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